작성일 : 09-07-03 13:58
[경전공부방] 불교 기초 교리<제3강>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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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이란 석가모니부처님을 말한다. 즉 불교란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석가모니부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셨고 사람들은 그 분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받았는가


또 우리는 왜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야 하며 또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을 알면 불교를 아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은 성불하는 법이다. 성불이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왜 부처가 되려고 하였고 또 석가모니부처님은 왜 우리 모두가 성불하시기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성불의 길을 가르치셨던가. 도대체 부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부처와 일반 우리들과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석가모니부처님이 되신 싯다르타 태자, 그 분이 부처님이 되시기 전의 모습과 부처님이 되신 후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면 이러한 의문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그 분의 일대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약 2500년전에 인도 석가족의 수도 카피라성에서 아버지를 정반왕으로 어머니를 마야부인으로 하여서 탄생하시어 그 이름을 싯다르타라하였다. 그 뜻은 ‘모든 소원이 성취되어진다’는 뜻이었다.


태자가 탄생하였을 적에 히말라야산맥에서 수행하던 한 예언자가 찾아와서 "탄생하실 태자는 이 나라에 머무시면 전세계를 통일하여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하여주실 전륜성왕이 되실 것이요. 출가를 하시면 부처가 되시어 만인을 제도하실 부처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예언하였다.


정반왕의 기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지만 정반왕은 태자가 궁에 남아서 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되어 주기를 바랐기에 내심으로는 태자가 출가한다는 말이 불안하게 들렸다.


하지만 탄생하시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이신 마하파자파티부인의 손에 의하여 그 다음의 왕위를 이어받을 태자로써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양육되어진 태자는 언제나 사색에 빠져있었고 우울함에 잠겨있었다. 이러한 태자를 보며 아버지 정반왕은 태자가 출가할 것을 더욱 더 두려워 하였다.


그래서 왕은 태자를 위하여 4계절의 궁전을 만들어주고 아름답고 젊은 여인들에게 태자를 시봉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태자는 궁전의 동서남북의 문을 통하여 유람(遊覽)하게 되었다. 거기서 태자는 늙은 이와 병든 이와 죽은 이를 만나고서 자신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이러한 생각은 태자를 더욱 더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문인 북문을 유람할 적에 만났던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초월하는 길을 찾기 위하여 수행을 하는 사문을 만난 일을 떠 올리면서 자신도 사문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하지만 그 당시 인도의 풍습에 의하면 유년기(幼年期, 태어나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시기)와 학생기(學生期, 배우는 시기)와 장년기(長年期, 자식을 낳고서 양육하는 시기)를 거치지 않고서는 편력기(遍曆期, 출가하여 수행하는 시기)에 들어 갈 수 없었다. 아직 자신이 학생기에 머물러 있음을 고뇌한 태자는 결혼을 서두르신다.


그리하여 태자는 이웃나라의 공주인 아쇼타라공주를 태자비로 맞이하시고 라후라라는 아들을 생산하시자 그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아들의 양육은 자신이 왕손인 관계로 가히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아시고서 스스로 편력기에 들어가 출가를 하신다.


이렇게 해서 육년을 고행하시고서 그 육년간의 고행으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뇌를 초탈할 수 없음을 아시고 나이자라강가에서 목욕을 하신 후에 보리수 밑에 앉으셔서 최후의 사색에 드신다.


그 날 새벽 태자는 깨달음을 얻으시고서 부처님이 되시고 자신이 얻으신 깨달음을 45년간이나 설법을 통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심어주시고 열반에 드신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일대기를 요약한 내용이다.


이 일대기속에서 우리는 고뇌하는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과 그 고뇌를 해결하여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신 석가모니부처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싯다르타 태자가 고뇌하던 문제는 생노병사의 고통으로부터의 해결을 위한 고뇌였으나 부처님이 되신 모습에서는 생노병사의 고통으로 해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부처님이 된다는 것, 곧 성불한다는 것은 생노병사의 고통이 해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불교란 생노병사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을 가르치는 가르침이고 그것이 해결되어진 모습을 우리는 부처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생노병사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져야 하는가. 즉 우리는 왜 성불하여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왜냐하면 그린 것을 해결하지 않고서도 잘 살고 있다고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사성제(四聖諦)가 있다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네 가지의 성스러운 전리란, 고(苦)에 대한 진리와 집(集)에 대한 진리와 멸(滅)에 대한 진리와 도(道)에 대한 전리이다. 고에 대한 진리란 인생은 모두가 고통이라는 것이고, 집에 대한 진리는 그 원인은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며, 멸이라는 전리는 집착을 끊으면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행복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며, 도에 대한 진리란 그러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 즉 팔정도(八正道)를 행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그 원인을 알아 질병이 완쾌된 상태를 설정해서 그 치료법을 택하여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이 중생들의 병을 진단한 것이 바로 중생들의 삶은 고퉁이라는 것이고, 그 병의 원인은 집착하기 때문이며. 집작을 끊으면 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처방으로서 팔정도(여덟 가지의 바른 길)를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중생들 그 차체를 질병에 걸린 상태로 진단한다. 그러기에 중생들이 삶 그 자체를 고통이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그 자체가 완벽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불행은 행복이 그 씨앗이 되어서 찾아오고, 그 행복은 불행이 그 씨앗이 되어서 찾아온다. 또 즐거움이란 고통이 그 씨앗이 되어서 찾아오며 그 고통은 즐거움이 그 씨앗이 되어서 찾아온다.


변방의 어떤 노인이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숫말 한 마리를 소중히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끼던 말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안타까위 하자 그 노인은 “그렇게 안타까워하지 마시오. 이 불행이 씨앗이 피어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며 초연해 하雩다,


그러던 어느날 그 숫말이 암컷 야생마 한 마리와 함께 돌아와서 새끼를 낳았다. 사람들이 와서 축하하자 그 노인은 “너무들 좋아하지 마세요. 이 행복이 씨앗이 되어 불행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며 초연해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외아들이 결들이지 않은 야생마를 타려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자 또 사람들이 와서 안타까워 하자 노인은 또 “너무들 안타까워 하지 마세요. 불행이 씨앗이 되어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며 초연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쟁이 나서 마을의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끌려가 살아 돌아온 이가 없었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졌기에 전쟁터에 끌려나가지 않고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


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는 우리들의 행복은 완전한 행복이 아니라, 불완전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왕이 사냥을 갔다가 길을 잃었다. 그래서 만가를 찾아 들어갔는데 오랜 시간 길을 찾아 헤매었던 까닭에 무척 허기져 있었다. 그래서 산 속 민가에서는 달리 대접할 것이 없어 감자를 삶아서 내놓았다. 왕은 허기졌던 까닭에 그것을 맛있게 먹었고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궁전에 들어와 감자를 삶아오게 하여 먹어보았더니 별로 맛이 없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운동 뒤에 마시는 맥주 한 잔이 서원하듯이 인간들의 즐거움은 고통 후에 찾아와야 배로 즐겁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처럼 인간들의 삶 그 자체는 행복도 즐거움도 불행과 고통이 있기에 느끼는 상대적인 감정일 뿐이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느끼는 그 자체를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디.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고통인 것이다.


우리들에게 인생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말은 상당히 염세적으로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에는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있고 때로는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것을 즐겁게 극복하라고 하지는 못할 망정, 삶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씀하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은 분명히 염세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부처님이 우리들의 삶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고통으로 받아 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란 것이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고통으로 보인다는 말인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학생이면서 매일같이 술이나 마시고 본드나 마시고 또 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불량한 청소년을 가진 부모가 있다고 하자. 이 청소년에게 있어서 자신이 술을 마시고 본드를 마시고 싸움을 하는 것, 그것이 그 동안은 아니다. 나름대로 즐거움도 있고 보람된 감정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부모의 심정은 고통 그대로일 것이다.


또 술에 취해 정신없이 즐거워 하면서 추태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 있는 부모님에게는 그 자체가 고통이다. 이처럼 부처님이 중생들을 보는 눈은 불량한 청소년을 가진 부모의 심정이며,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자식을 쳐다보는 부모의 심정,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들이 즐거움도 부처님에게는 고통 그 자체로 보아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중생들이 삶의 모습을 보면서 왜 고통스러워 하시는 것일까. 중생들이 삶이 불량한 청소년의 모습과 같고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모습과 같기 때문에 그것이 창피해 고통스럽게 느끼시는 것일까. 그것은 청소년을 가진 부모님이 자기 자식을 보는 심정 또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는 자식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왜 자신의 자식들을 보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자식들이 누리는 지금의 즐거움 뒤에는 반드시 커다란 고통이 있음을 자신들은 알지만 자식들은 그것을 모르고 지금 거기에 탐착하여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삶을 고통스럽게 느끼시는 것은 중생들이 누리고 있는 삶 그 자체에는 커다란 고통이 따르고 있음을 당신은 아시건만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고 지금의 삶에만 탐착하여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들이 삶 그 궁극적인 곳에 오는 고통이란 무엇인가. 우선 삶이 있으니 죽음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요, 젊음이 있으니 늙음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요, 건강이 있으니 질병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요, 행복이 있으니 불행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요, 즐거움이 있으니 괴로움이라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죽고 난 다음에 자신이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대비하려고 하지 않는다. 젊은 자는 자신의 젊음이 영원할 줄 알고 늙은이를 업신여기고, 건강한 자는 자신의 건강이 영원할 줄 알고 질병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행복한 자도 즐거운 자도 불행과 괴로움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불행이, 괴로움이, 늙음이, 질병이, 죽음이 찾아오면 울고 불고 하면서 슬퍼하고 괴로워 한다. 이것이 중생들이 삶이기에 부처님에게는 중생들이 삶 그 자체가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죽음의 고통 그것이 싫다면 태어나지 않았으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어쨌든 태어나 있다. 그러기에 죽음이라는 고통은 누구나 다 겪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중생들은 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거부하려 하고 또 인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죽음이나 불행 등이 닥쳐오면 그때 가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고 부처님을 원망한다. 이러한 중생들이 삶의 모습은 부처님의 눈에는 질병을 가진 환자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신병환자가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음을 모르듯 중생들도 자신들이 이러한 질병에 걸려 있음을 모른다. 하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중생들은 환자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루 빨리 중생들을 치료하여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들도 하루 빨리 병을 고쳐 건장한 몸0] 되어야 한다. 즉 중생들도 빨리 병을 치료하여 건강체인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행복과 즐거움만을 원하고 불행과 고통을 배척하려고 한다. 즉 인간의 행복과 즐거움은 그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기에 고통인 것이다. 그런데 행복과 불행, 그리고 즐거움과 고통 등을 느끼게 하는 감정은 도대체 왜 생기는 것일까?


그 문제를 사색하다 보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문제가 생로병사의 문제이다.그렇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 ,그리고 즐거움과 고통이라는 상대적인 세계를 뛰어 넘어 절대적이고도 완벽한 행복을 누리지 위해서 우리들은 우선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이유이며 또 성불하여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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