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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0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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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공부방] 불교 기초 교리<제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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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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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은 어떠한 분인가
그렇다면 사막의 비유에 있어서 사막을 건너는 이들에게 방향이 되어주는 별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이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부처님은 항하의 모래수와 같이 많다 하였으며 또 우리가 금방 떠올리는 부처님도 석가모니불을 비롯하여 아미타불, 약사여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상당수가 있다. 그렇다 보니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을 바르게 결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불타신앙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교 신앙을 이해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이란 어떠한 부처님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불교에서 지칭하는 부처님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가부터 알아야 하겠다.
단단한 바위에 몇 백년 몇 천년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진다면 그 딱딱한 바위도 깎이어 마모된다. 우리는 이것을 보며 힘없는 물방울이 오랜 시간에 걸쳐 딱딱한 바위를 뚫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바위 자체에 마모되는 성질이 없다면 물방울이 천년이 아니라 만년 아니 영원히 떨어진들 바위에 구멍이 뚫리겠는가. 이처럼 싯다르타 태자가 진리를 깨우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진리 자체가 깨달아질 성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과연 부처가 될 수 있었을까? 바꾸어 생각한다면 진리가 싯다르타 태자를 부처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이 진리를 불교에서는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다. 앞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緣)에 의하여 이루어져서 항상 하지 않건만(諸行無常) 항상 한다고 생각하고, 또 모든 것은 연에 의하여 생긴 것이기에 나다,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건만(諸法無我) 나다,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기에 생로병사가 고(苦)로 인식되어지고 그 원인은 항상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과 나나, 나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하여 나다, 나이 것이라고 집착(集)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 취하려는 마음(貪)과 내가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는 마음(瞋)을 가지고 자신을 항상 합리화하고 변명하려는 마음(痴)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것은 연에 의하여 생기고 없어지기에 항상 하지 않고 또 나다, 나의 것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음을 알아 생로병사를 수용하여 좋아하는 것만 피하려는 마음과 싫어하는 것은 취하려 하지 않는 마음을 버리며 또 자기 합리화와 자기 변명을 않으면(道=八正道) 진정한 행복(涅槃寂淨, 滅)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부처님이라 하여 신앙한다는 것은 뭔가 가슴에 쉽게 와 닿지를 않는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화 되어지는 부처님이라고 할 때는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으신 깨달음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내용을 석가모니부처님이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준 진리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진리의 내용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본래 마모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위를 물방울이 천년이 아니라 만년에 걸쳐서 떨어진다 한들 구멍을 뚫을 수 없듯이 본래 깨우칠 수 없는 진리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깨우쳐 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깨우쳐 질 수 있는 작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 부처님이라고 하여 인격화 시킨 대상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깨우쳐 질 수 있는 작용 즉 진리의 작용을 말한다. 그러면 그 작용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가?
어느날 뉴우톤은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뉴우톤은 생각하였다. "왜 사과는 밑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뉴우톤은 "사과를 밑으로 당기는 어떠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힘은 땅의 힘일 것인데 그렇다면 지구가 사과를 당겼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모든 물체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고 가정할 때 지구와 사과가 서로 당기고 있다가 지구의 힘이 강하여 사과가 지구쪽으로 끌려가서 떨어진 것이구나. 그렇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체는 서로 당기고 있다"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뉴우톤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만유인력의 법칙은 뉴우톤이 발견하기 전에도 있었고. 또 뉴우톤이 발견하였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더욱이 만유인력의 법칙이 숨어 있다가 뉴우톤에게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항상 누구나 이 만유인력의 법칙 속에서 살고 있었건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진리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시기 전에는 없었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셔서 새로 생긴 것도 아니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셨다고 없어진 것도 아니며, 숨어 있다가 석가모니 부처님 앞에만 나타난 것도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시기 전에도 있었고, 깨달으신 당시에도 있었고, 또 지금도 우리들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으며 누구나 그 진리의 혜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진리의 작용은 모두에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 진리의 작용을 불교에서는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고, 또 그 진리의 작용을 깨우친 사람도 역시 부처님이라 하는데 그 대표적인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의 작용이 나타난 구체적인 형태를 이야기한다면 수없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모든 것이다 진리의 작용의 구체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경우를 보더라도 일찍 여읜 어머니 또 사문유람을 통하여 만난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들 그리고 사문 나아가 마지막으로 6년 고행을 그만 두게한 모든 여건들 이러한 것들이 진리의 구체적인 모습인 것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얼마든지 의인화되어 신앙의 부처님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이러한 의인화된 진리의 작용이 경전에서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의 세계가 그만큼 광범위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에게 있어 신앙의 대상을 확실히 파악함에 혼란을 야기시키는 일면도 있다. 그러기에 불교에는 그 많은 부처님을 정리하기 위한 사상으로서 삼신불(三身佛) 사상이 있는 것이다.
삼신불이란 부처님의 모습을 셋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르침인데, 부처님의 세 가지 모습을 법신불(法身佛)과 보신불(報身佛)과 응화신불(應化身佛)이라 한다. 하지만 필자는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응화신불을 응신불과 화신불로 분류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법신불이란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진리란 그 색깔도 모양도 냄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말도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억지로 인격화시켜서 말로 표현하여 법신불이라 하는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비로자나불(毘盧蔗那佛)이라 하고, 「대일여래경(大日如來經)」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 하는 분이 그분이시다.
그리고 보신불이란 은혜로운 부처님으로서 중생을 구원하시고자 원을 세우신 부처님이시다, 그리고 이분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신데 「화엄경」에서는 노사나불이라고도 하며.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 또 밀교에서는 관자재여래(觀自在如來) 등 여러 가지 이명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응화신불은 보신불의 중생구원의 서원을 실천하시는 부처님의 모습으로 응신불이라고도 하고 화신불이라고도 한다. 응신불이란 중생의 서원에 응하기에 응신불이라 하고 화신불이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이 세상에 모습을 나투었다 하여 화신불이라 하는데, 사실 중생의 서원에 응하였기에 변화하여 나타나는 것이므로 응신불이나 화신불이나 같은 뜻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부처님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일부러 응신불과 화신불을 분류해서 설명하겠다.
즉 화신불이란 보신불의 중생구원의 서원을 실천하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이 세상에 모습을 나투시는 분은 모두가 화신불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분으로서 인간의 몸으로 나오셔서 인간에게 법을 설하신 부처님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들 수 있기에 석가모니불 한 분으로 한정하고자 하며. 응신불이란 중생들의 소원에 응하시는 부처님은 모두가 응신불이지만 그 특징상 영험을 보여주시는 성격이 강하기에 약사여래나 관세음보살 · 지장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등의 법신불과 보신불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제외한 모든 제불여래에 한정하고자 한다.
어쨌든 이러한 응신불이 존재하는 것은 중생의 소원과 부처님의 서원이 틀리기 때문이다. 중생들이 육신으로 누리는 부귀영화와 권세 등은 육신이 사라지면 육신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중생들이 육신에 찾아오는 늙음, 병들음, 죽음, 가난 등도 육신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진다. 하지만 중생들의 마음에 찾아온 늙음과 병들음. 죽음, 가난은 육신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고 중생들이 마음에 찾아온 부귀영화와 권세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서원은 중생들의 마음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하는 것이지만 중생들은 그것보다도 육신의 부귀영화와 건강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응신불은 우선적으로 중생들의 소원에 응하여 중생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부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 어린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왕이 백방으로 아들을 찾고 있던 중 세월은 흘러 아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아들은 자신이 그 나라 왕자임을 모르고 거렁뱅이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아들을 우연한 기회에 만난 왕은 한 눈에 그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접근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왕자임을 모르는 아들은 왕이 자신에게 접근함을 보고 큰 해를 입을 까 두려워서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래서 왕은 한가지 방편을 생각하여 자신도 거렁뱅이와 같은 모습으로 변장하여서 아들에게 접근해 말하였다. "왕궁에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말에 의하면 왕궁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구만. 자네를 보니 참으로 성실하게 보여 내가 소개할 터이니 왕궁에 가서 화장실 청소를 해보지 않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굶주림의 고통은 면할 수 있을 걸세, 어떤가?" 그러자 아들은 그의 말을 믿고 왕궁으로 따라갔다. 그래서 왕궁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살게 되었다. 궁전에서 살게 된 아들에게 왕은 이번에게 창고지기장으로 변장하여 나타나서 “자네같이 성실한 사람이 화장실 청소나 하면서 이런 곳에 있으면 되겠는가. 우리 창고에 와서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터인데 오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아들은 승락하여 창고에 가서 일하면서 지금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또 관리로 변장하여 나타나서 “자네같이 유능한 사람이 이런 곳에서 창고일이나 하면 되겠는가 내 밑에 와서 벼슬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지금보다 대우도 좋아지고 명예도 얻을 걸세”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은 벼슬을 하게되었다. 이런 식으로 왕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나서 보살피며 그의 지위를 조금씩 올려주다가 드디어는 나라의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임종을 맞이한 왕은 모든 신하들을 불러 모아놓고 재상을 가리키며 "사실 이 사람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찾던 나의 아들이요. 하지만 아들이 자신이 왕자임을 믿으려 하지 않기에 내가 방편을 사용하여 지금 그를 재상까지 끌어 올려놓았소. 나는 이제 생명이 다하여 죽으니 이제 여러분은 나의 아들을 왕으로 섬겨 이 나라의 정사를 돌보시오"하였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의 자비에 감사하여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이 비유에서 왕은 법신불 즉 비로자나불이다. 그리고 아들은 중생을 말한다. 또 왕이 아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있을 때의 그 왕의 마음은 보신불 즉 아미타불이다. 그리고 왕이 거렁뱅이로 변장하여 아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거는 모습은 석가모니불인 화신불의 모습이고, 또 궁중에서 사는 아들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나서 그를 보살피는 모습은 응신불인 약사여래·관세음보살·지장보살 등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의 부처님의 모습 중 우리들의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은 누구인가. 즉 육도를 윤회하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이 윤회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의지해야 할 부처님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육도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윤회에서 벗어나 부처를 이루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부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들었던 비유를 가지고 생각하여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법신불로 비유되어진 왕이라는 지위 그것은 왕이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지위이다. 다시 말해서 왕이 아들을 그렇게 만들고자 하는 목표인 것이다. 그러기에 법신불이란 우리가 성불한 모습, 우리들의 목표가 되는 것이며.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희망으로써 우리를 격려해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기에 신앙의 대상은 아니다.
또 화신불로 비유되어진 변장하고 왕자에게 나타나 왕자를 설득시키는 왕에게 변장하는 방면의 지혜를 떠오르게 한 것은 왕자를 구원하여야 겠다는 왕의 일념이었다. 즉 변장하고 왕자에게 나타나 왕자를 설득시키는 왕은 왕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왕의 간절한 마음이 변화한 모습인 것이다. 이와 같이 화신불이란 중생들이 등에 짊어진 업장이 무겁다고만 칭얼거릴 줄 알지 그것을 먹을 줄도 모르고 또 자신을 밝혀주고 있는 별에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기에, 이를 안타깝게 여기어 부처님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오셔서 솔선수범하여 사막을 건넘을 보여 주시면서 중생을 설득시키신 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신불은 중생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보신불의 간절한 서원이 변화한 것이다. 그러기에 화신불이신 석가모니불은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신 고마운 스승님이시지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어떤 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하여 보자. 지나가는 이가 길을 가르쳐 주었건만, 길을 물은 이가 가르쳐 준 길은 가려고 하지 않고 길을 가르쳐 준 이의 뒤만 쫓아다닌다면, 이 사람은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결코 갈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되려는 중생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성불하는 법을 실천해야지 그분을 신앙의 대상으로 알고 그분의 뒤만 쫓아다닌다면 성불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이 부처를 이루기 전에 육년간의 고행을 하였다하여 자신도 그러한 고행을 해야만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할 때까지 이천번의 실패를 하였다고 하여 자신도 에디슨이 한 것처럼 이천번의 실패를 거듭해야만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은 화신불인 석가모니불이나 그분이 부처를 이루시기 전에 행하였던 수행은 아니다. 즉 화신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에게 성불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고마운 스승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자신이 왕자임을 모르고 궁전에서 화장실 청소나 하고 있는 왕자가 궁전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언제든지 궁전에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뛰쳐나갈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변장하여 궁전에서 사는 왕자를 보살폈던 왕이 있었기에 왕자는 구원될 수가 있었다. 즉 응신불이 있기에 중생들은 사바세계에서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 아주 투철한 어떤 사람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이 사람이 아들에게 "그 병은 부처님이 네 마음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니, 너의 마음을 치료하면서 기쁘게 죽음을 맞이하라"고 하면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사람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는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처럼 종교를 마시고 취해버린 정신병자의 모습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이 말하는 신앙은 이론적으로는 옳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하여 부처님에게 매달리며 "나를 죽이시고 나의 아들을 살려주소서" 하는 것이 정상이다.
즉 우리 중생들이 성불로 가는 길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가 있다. 그러기에 중생들은 부처님의 서원대로만 살수는 없다. 더욱이 중생들은 부처님의 서원대로 살고자 하면 할수록 장애가 되는 요인들이 너무도 많음을 잘 알고 있다. 이럴 때 영험을 보여 주시면서 중생을 보살피시는 부처님이 응신불이다. 하지만 영험을 주시는 것은 그 시련을 극복시켜 주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정진할 수 있게 하심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험에만 의지하여 갈 길을 가려 하지 않고 영험만 달라고 한다면, 이는 어떤 이가 길을 가면서 배가 고파 밥을 달라고 하여 다른 이가 음식을 주어 잘 대접하였더니 그 음식의 맛에 취하여 가던 길을 중단하고 그 음식을 조금만이라도 더 먹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어리석음과 같다. 즉 신앙의 대상을 자신에게 영험을 주는 응신불로 삼아서 관세음보살이나 부르고 또는 지장보살이나 부르는 이러한 중생들이 바로 맛있는 음식을 조금이라도 더 얻어먹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와 같은 중생이다. 응신불이 주시는 영험이란 계속해서 성불의 길로 매진하기를 바라서 주는 것이지 그냥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이란 응신불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왕자님을 모르고 헤매는 왕자를 구원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왕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왕의 일념이었다. 이러한 왕의 일념이 왕자를 설득하고 끝까지 왕자를 보살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중생들을 구원하는 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하시는 분은 중생을 구원하고자 원을 세우신 보신불 즉 아미타불이신 것이다.
앞의 사막의 비유에서 사막을 여행하는 이에게 길을 인도하여 주는 별은 보신불이다. 별은 그 별을 보는 이에게 길이 되어주고, 보지 않는 이에게는 길이 되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길을 인도하건만 그것을 보고 안보는 것은 중생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신 부처님은 모든 중생에게 불청우(不請友)가 되셔서 중생이 청하지 않아도 사막을 건너는 모든 이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 그리고 화신불로 변하기도 하고 응신불의 모습을 가지고 영험을 보이기도 하시면서 중생들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보살피신다.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이란 바로 이 보신불 즉 아미타불인 것이다.
아미타불은 210억의 불국토를 돌아다니며 모든 부처님들의 서원들 중에서 48가지의 수승한 서원을 뽑아서 극락정토를 완성하신 부처님이시다. 즉 210억의 불국토를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들의 서원을 섭렵하였다는 것은. 아미타불의 서원에는 모든 부처님들의 서원이 함축되어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의 서원이 종합되어진 형태가 바로 아미타부처님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즈음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만화영화 중에서 우주의 나쁜 로봇이 인간을 괴롭혀 그것을 막기 위하여 여러 로봇이 모여 싸우다가 안되니까 그 로봇들이 결합하여 커다란 로봇으로 변신해 우주의 나쁜 로봇을 무찌르는 만화영화가 있다. 그 만화영화에 비유하여 말하자면 여러 로봇들이 결합하여 커다란 로봇으로 변신하듯이 제불여래가 결합하여 더 완벽한 부처님의 모습으로 변한 모습이 바로 아미타불이라 이해하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신앙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부처님은 보신불인 아미타 부처님이시다.
즉 불교에 있어서 신앙의 형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아미타불에 의지하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약사여래 등등의 응신불인 제불과 호법신장들의 옹위를 받으면서 비로자나불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라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함이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체인 신앙의 대상은 보신불인 아미타불이지 영험을 주시는 응신불이나 진리 그대로의 부처님이신 비로자나불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은 아미타불은 죽은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한 부처님일 뿐 불교에서 신앙의 근본대상이 되는 것을 잘 모르고 있기에 대부분이 관음신앙을 하고 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은 머리에 쓴 보관에 아미타부처님을 이고 계시며 또 아미타부처님의 왼쪽에 서서 시봉하는 보살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여 보면 한국불교의 신앙에 대한 모순을 금방 알 수 있다.
또 중국영화를 보면 소림사 스님들의 말머리와 말끝에 '아미타파'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나무아무아미타불'을 말하는 것으로, 소림사라면 선종의 초대조인 달마대사가 창건한 사찰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염(念)하는 장면을 통하여 대승불교에 있어서 종파를 막론하고 아미타불이 불교신앙의 근본대상이 되는 부처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이 아미타불은 대승불교 신앙의 근본대상이 되는 부처님이었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아미타불이 대승불교 신앙의 근본이 되었다. 그 증거로 지금도 절에서 기도 정진할 때 다른 부처님의 명호에는 '나무' 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정근하지만 아미타불을 정근할 때는 항상 '나무' 라는 말을 붙여서 정근한다.
즉 관음정근은 그냥 '관세음보살', 지장정근은 그냥 '지장보살', 석가모니불의 정근은 그냥 '석가모니불', 그리고 약사여래정근은 그냥 '약사여래' 라고 명호만을 부르건만 아미타불의 정근은 귀의한다는 뜻이 담긴 '나무'라는 말을 넣어서 '나무아미타불'하고 정근하고 있는 것이다. 또 모든 종파를 막론하고 큰스님들이 법문하시다가 부처님의 경전을 인용하시면서 그 끝에 '나무아미타불'을 신도들과 함께 길게 복창하는 것과, 옛날에 조성되었던 불상에는 아미타불상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경주박물관에 가면 많은 불상이 아미타불상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왜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 신앙의 대상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제시대 때 일본정부가 우리의 정신문화를 말살하기 위하여 전시교학(戰時敎學)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일본천황이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 가르치면서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이나 천황만세를 부르는 것은 동일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에 반발한 큰스님들이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극락을 발원하는 것은 미신적인 신앙이라 하면서 절에 있는 염불당을 없애버렸다. 그러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찾는 것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불교에 있어서 신앙의 대상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그러자 아미타불을 가장 가까이에서 시봉하는 보살님인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도록 시켰던 것이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님으로서 보관에는 아미타불을 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관세음보살만 부르게 하지 않고 '나무아미타불' 뒤에 관세음보살을 붙여서 부르게 하였다. 그러던 것이 나무아미타불이 사라지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게 되더니, 요즘은 지장보살이니 약사여래니 또는 '나무비로자나불'이니 '마하반야바라밀'이니 하면서 불교신앙의 대혼란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영가는 지장보살, 병들면 약사여래 등등을 부르게 하는 식으로 불교답지 못한 신앙의 형태로 적당히 타협해 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텔레비전의 전기와 라디오의 전기와 또 냉장고의 전기가 각각 다른가. 모두 다 같은 전기이다.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과 약사여래와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 다른가. 아니다. 중생구원에 있어서 다 한 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부처님들의 서원을 모두 성립하여 만든 서원이 아미타불의 48원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냉장고, 선풍기가 다 전기의 응화신인 것처럼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약사여래, 석가모니불 등이 모두가 아미타불의 응화신불인 것이다.
불교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부처님은 사막을 건넌 모습인 법신불도 아니며,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 부처님의 인도를 받으며 업장소멸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한다. 중생들이 방황하기에 우선 그들을 달래 놓기 위하여 방편을 쓰시는 관세음보살, 약사여래,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의 응신불도 불교의 신앙대상의 부처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오로지 사막 저편 하늘에 영롱한 불빛이 되어서 항상 중생들의 머리 위를 비추며 그들을 사막 저편으로 인도하고 계신 보신불 즉 아미타불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대통령에게 상서를 올리어 그것이 채택되면 각 부의 담당장관에게 명령이 떨어지듯,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해당 담당의 보살과 부처님들이 활동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신앙의 부처님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 신앙하셨던 부처님도 아미타부처님이시며 석가모니 부처님 또한 아미타불을 신앙할 것을 중생들에게 간곡히 당부하시고 계신 것이다.
출처 http://www.obong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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