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9-07-03 13:57
[경전공부방] 불교 기초 교리<제2강>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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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불교도 종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종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판단하여야 우리가 불교를 종교로서 가지고 산다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한 정의는 무수히 많이 있다. 그 중 필자가 가장 이해하기 쉬웠던 종교의 정의는 미국의 종교학자인 디리히의 "종교란 궁극적인 관심사"라는 말이다.


이 말은 종교란 그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에다가 두는 이가 있다면 그의 종교는 돈이 될 것이고, 명예에다 두는 이가 있다면 그의 종교는 명예가 될 것이고, 권력에다가 두는 이가 있다면 그의 종교는 권력이 될 것이고, 사랑에다가 두는 이가 있다면 그의 종교는 사랑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자기자신의 종교가 불교라는 것은 자기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있는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두고 산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땅에 불교신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돈교신자가 아니면 명예교신자, 사랑교신자 , 권력교신자 이러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설사 불교신자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들도 사실은 불교가 아니라 스님교신자가 아니면 절교신자, 아니면 영험교신자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추종하는 스님이 자신에게 어떠한 특별한 가르침을 준 것도 아니고 제대로 말을 붙여 본 것도 아닌데 남들이 큰스님이라니까 남의 말만 듣고 그냥 추종하는 이들, 이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큰스님이니 이들의 종교는 불교가 아니라 스님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절에 가서 고작하는 일이라고는 법당에 들어가서 절이나하고 법회때는 축원문을 읽는가 어쩌는가 그것만을 확인하러 다니면서도 큰 절만을 찾아 다니는 이들의 인생에 있어서도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큰 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이들의 종교도 또한 절교이지 불교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영험이 있다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는 이들의 인생에 있어서도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영험이니 이들의 종교 또한 불교가 아니라 영험교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종교를 불교로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 불교신자 즉 불교를 종교로서 살아가는 가장 모법적인 모습인 설산동자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하여 보겠다.


설산에서 수도하는 한 동자가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도에 전념하고 있었던 어느날 어디선가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제행무상(諸行無常)], 이세상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네[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는 구절이 들려왔다.


동자는 그 심오한 진리의 말씀에 너무나도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그 진리의 말씀을 한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발 밑에서 자신의 육신과 피를 탐내는 나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동자는 나찰에게 물었다. "지금의 진리의 게송은 당신이 읊으신 것입니까?" 그러자 나찰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동자는 계속해서 "그러면 그 다음 구절도 알고 계시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진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수년을 설산에서 수행하여 왔지만 그대의 게송과 같은 진리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알려 주시면 저는 바른 깨달음을 얻을 것 같으니 간절히 청합니다."라고 나찰에게 그 다음 법문을 들려 줄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러자 나찰은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겠다. 만약 내가 그 다음 구절을 일러준다면 그대의 뜨근뜨근한 살코기와 피를 나에게 주겠는가? 그러면 내 일러주마"라고 말했다. 설산동자가 "그러마" 라고 약속을 하자 나찰은" 이 도리를 인정하면 그것이 고요한 열반의 세계로다[열반적정(涅槃寂靜)]"라고 그 뒷 부분의 게송을 읊어 주었다.


이 게송을 들은 동자는 너무 기뻐서 이 바위 저 바위를 뛰어 다니며 이 문구를 바위에 세겨 놓고 난 다음 그 몸을 나찰에게 던졌다.


이 설산동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육신이 아니었다. 진리를 깨닫는 것 그것이었다. 그러기에 동자는 그 진리의 한 구절을 듣기 위하여 자신의 육신을 나찰에게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설산동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가 불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즉 우리가 불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만약 지옥에 있다면 지옥이라도 갈 수 있는 마음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의 살과 피를 먹고 사는 나찰이 설한다 하여도 가서 들을 줄 아는 마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마음, 그러한 마음을 지닌 이를 우리들은 불교신자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불교를 종교로서 가지고 산다는 것은 정법을 위해서는 이 목숨도 바칠 줄 아는 마음 즉 순교할 줄 아는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절의 건물을 보고 절에 다니면서 스스로를 불교신자라 자청하고, 특정한 스님만을 따라 다나면서 자신이 불교도임을 주장하며, 영험만을 쫓아 다니면서도 자신의 종교가 불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가 불교신자임을 자청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에게 정법과 사법을 구분할 힘이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이 가진 가치관은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 나아가서는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개인의 바른 가치관 즉 바른 종교관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지 못한 종교와 신앙은 자신이 죄악을 범하면서도 그 죄의식을 마비시키고 또 자신의 주변까지도 죄의식에 마비되게 하여 이 사회를 커다란 혼란으로 빠뜨리고 우리들을 불행으로 몰고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돈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산다고 가정하여 보자. 디리히의 종교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이 사람의 종교는 돈이 될 것이다.


돈이 종교인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하려고 하여 부자를 보면 부러워하고 가난뱅이를 보면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 사람들 중에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경외의 눈빛을, 돈이 없는 이에게는 경멸의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가 경멸의 눈빛보다는 경외의 눈빛을 받기를 원하는 법이니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은 경외의 눈빛을 받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고, 그러면서 그들도 그와 같이 변해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돈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심지어는 돈으로 행복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돈에 빠져든 집단을 탄생시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난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무시당하고 부유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경외의 눈빛으로 보여지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아니한가.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는 무시하고 부유한 국가에서 온 사랍들에게는 경외의 눈빛을 보내고 있지를 않은가. 그리고 우리들 또한 다른 집단으로부터 경외의 눈빛을 받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사고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치달아 여러 가지 사회의 병폐를 낳아 끝내 우리들을 패망으로 몰고 가고야 말 것이다.


또 세계 역사 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을 보라. 그 모든 것들이 잘못되어진 가치관 즉 잘못되어진 종교에 한 집단이 빠져들어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지나친 민족주의 그리고 평화주의 정의로움이 우리들에게 수 많은 죄악을 범하게 하고서도 우리들에게 그것들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게 할 조그마한 양심까지도 마비시키지 않았던가.


일본의 대동아전쟁, 나치스의 유태인학살, 공산주의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역사. 그리고 저 청교도들과 천주교인들이 아메리카와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하여 지금은 씨를 말려버린 역사들이 이 모든 사실을 잘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가 다 우리들을 평화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되어진 종교는 우리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에게까지도 고통을 안기고 패망으로 이끌면서도 거기에 대하여 조그마한 죄의식도 느낄 수 없도록 우리들의 양심까지도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바른 종교를 갖는다는 것 그것은 나 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사회, 나아가서는 이 인류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종교관 다시 말해서 어떠한 가치관이 올바른 것일까.


하루는 어떤 이가 절에 와서 필자를 보고 교회를 나오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그 교회에 나가면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더니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 하시는 안수 가도는 대단히 염검하여 목사님의 안수기도 후에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그러면 그 장님이 육신의 눈만 뜨고 마음의 눈은 뜨지 않더이까”하고 물어 보았더니 “마음의 눈은 모르겠지만 육신의 눈이 뜨였으니 차츰 마음의 눈도 열리겠지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육신의 눈이 뜨인다고 반드시 마음의 눈까지 열린다고는 볼 수 없지요. 육신의 눈을 뜬 이들도 마음의 눈을 못 떠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데 그 사람이 지금 육신의 눈이 열렸다고 해서 어찌 마음의 눈도 열렸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 사람은 육신의 눈이 어두울 때는 못 볼일은 보지 않고 살아도 되었지만 이제 육신의 눈이 뜨였으니 못 볼일도 많이 볼 것이니 아마 마음의 눈은 더욱 열리기 힘들 겁니다. 종교의 참다운 기적은 육신의 눈을 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은 뜨지 못했어도 마음의 눈을 열러 열심히 살아다는 모습을 눈이 성한 이들에게 보여주어 그들이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이 그렇다 육신의 눈이 멀고 귀가 멀고 다리가 절름발이고 말을 못하는 등의 신체 장애는 죽으면 다 없어진다. 아무리 죽을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그 병도 죽으면 모두 없어진다. 또 아무리 가난하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죽으면 모두가 없어진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멀고 마음의 귀가 멀고 마음의 다리가 절름발이고 마음의 입이 닫혀 있는 이는 죽어서도 장애인이다. 그리고 마음이 병든 이는 죽어서도 환자이며 마음이 가난한 이는 죽어서도 가난할 수 밖에 없다. 또 마음의 눈이 먼 이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못 볼 것만 보고 살면서 죄를 짓지만 마음의 눈을 열고 육신의 눈이 먼 이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눈이 멀었음을 일깨워 주는 삶을 산다. 그리고 마음의 귀가 먼 이는 육신의 귀를 가지고 들어서는 안될 소리만 들어가면서 죄를 짓는다. 하지만 마음의 귀가 열리고 육신의 귀가 먼 이는 우리에게 마음의 귀가 멀었음을 깨닫게 하는 삶을 산다. 마음이 병든 이는 육신이 건강하여도 그 건강한 육신을 가지고 죄만 짓고 살아간다. 하지만 마음이 건강한 이는 육신의 병이 들었어도 건강한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마음이 병들었음을 일깨워준다. 또 마음이 가난하고 육신이 부유한 이는 자신의 부유를 가난한 이의 재산을 빼앗는 것에 사용한다. 하지만 육신이 가난하더라도 마음이 부유한 이는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삶을 살면서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어 준다.


진정한 기적이란 마음의 장애를 마음의 질병을 그리고 마음의 가난을 없애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루는 어떤 이가 와서 자신의 종교를 필자에게 믿으라고 권하면서 “이제 곧 심판의 날이 다가와서 세계는 멸망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재앙이나 자연재해 등이 바로 심판의 날이 왔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날이 와도 우리 종교를 믿는 이들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은 불구덩이 속 지옥으로 떨어져 한없는 고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물어보았다. “교통사고로 가족이 모두 죽고 혼자 살아 남으면 죽은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다, 산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길래 “저는 세상의 멸망이 찾아와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중생들이 다 살아지고 폐허가 된 곳에서 혼자서 살아 남기 보다는 차라리 같이 죽기를 바랍니다. 그 쓰레기며 또 재건하느라 죽도록 고생만 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또 천상에 사는 중생들은 수승한 육신을 가지고 산다고 들었는데 저도 천상에 갈 때는 지금의 육신은 버리고 그들과 같은 수승한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종말이 오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또 당신 말씀대로 당신의 종교를 믿지 않아서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하여도 후회는 안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을 해보니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지옥을 모면해 보려는 마음이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만일 내가 부처님을 믿다가 지옥에 떨어진다 하여도 또한 내가 뿌린 씨앗이니 부처님과 함께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렇다. 자동차가 망가졌는데 운전사가 자신도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이가 다 웃을 것이다. 또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졌는데 운전사가 자신도 배가 고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웃을 일이다. 그리고 자동차가 낡았다고 운전사도 늙어야 한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자동차를 폐차시킨 운전사가 자신도 자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육신이 병이 걸리면 마음도 병이 들고 육신이 가난해지면 마음도 가난해지며 육신이 늙으면 마음도 늙고 육신이 죽으면 자신의 마음가지도 죽는 줄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종말이 와서 세계가 멸망해도 없어지는 것은 육신이지 이 마음은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세계 이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에는 그 세계에 맞는 육신이 있을 것이다. 만약 육신이 죽어 저 천상에 간다면 그 천상인간의 육신을 받아서 그곳으로 가야지 사바세계에서 살던 육신을 가지고 천상에 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더욱이 고통의 근원은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주사를 맞던 일을 생각해보라. 선생님이 내일 주사를 맞는다고 하면 그 때부터 고통은 시작된다. 그리고 주사를 맞고 나오는 아이들에게 아픈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아프냐고 물어본다. 이 순간들은 다 고통이었다. 그러나 주사를 맞고 나오는 순간부터 그러한 고통은 다 사라졌다. 어차피 맞을 주사 안 맞으려고 발버둥치니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종말도 반드시 온다. 그 순간은 바로 내가 죽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종말을 피하려고 하는 마음 그 때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백보 천보 양보하여 그 종말을 믿고 그 종교를 믿었다고 햐여 보자. 그러면 믿음이 구원인데 어디까지가 구원이 될 믿음이고 어디까지가 구원이 못 되는 믿음인가 하는 기준도 애매하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어디까지 해야 되는 지도 모르는 믿음을 향해 어떠한 노력을 하란 말인가. 돈 주고 구원의 티켓을 사는 것만이 믿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나쁜 일을 밥 먹듯이 하여 신앙인이 지옥을 가는 것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하니 그 사람이 “자신은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회계하고 십일조도 거르지 않고 내고 있으며 내가 하는 일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하느님도 용서하실 것이고 그러니 지옥으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해서 할말을 잊은 적이 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교회에 가는 일 십일조를 내는 일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일 그리고 남들을 교회로 데리고 가는 일등은 자신이 짓는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선행은 선행일 뿐이고 악행은 악행 그대로이기에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자신이 지은 악행에 대한 대가는 언젠가는 받으려는 각오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바르지 못한 종교는 말한다. 육신의 부귀영화와 권세와 건강을 주겠노라고. 자신을 믿으면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병이 낳고 장님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서서 걷는다고. 또 세상에 종말이 와도 당신만은 영원히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그리고 이제까지 지은 죄를 믿음만 가지면 다 용서해 주겠노라고. 그러한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건강체를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이 있을까. 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죽는 순간에 돌아보면 다 순간적인 삶에 불과한 헛된 것 일텐데 또 죽으면 없어지는 것 일텐데 그러한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잇단 말인가. 덧붙여 종교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낼 수 있는 강한 의지를 주기 보다는 어떻게든 모면해보려는 약삭빠르고 나약한 생각을 갖게 한다면 어찌 바른 종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바른 종교란 마음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마음의 부귀영화와 마음의 권세와 마음의 건강을 약속하면서 진정한 영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나감에 있어서도 나약해지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종교를 논 할적에 흔히 미신(迷信)과 정신(正信)을 가지고 종교를 논하곤 한다. 미신(迷信)과 정신(正信)의 그 차이는 미신이란 자신의 욕망에 이 세상이 따라 주기를 바라는 것에서 비롯되는 믿음이고, 정신(正信)이란 이 세상의 진리에 자신이 순응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는 믿음이다.


건전한 종교란 정신(正信)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종교의 건전성을 논 할 적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미신(迷信)인가 정신(正信)인가를 스스로가 판단하여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교란 마음의 부귀영화와 건강 권세 등을 약속하는 또한 정신(正信=바른 믿음)의 종교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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