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4-14 10:28
[사찰문화실] 147) 초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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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초

사찰 법당의 앞 불단에는 양초와 향이 항상 비치되어 있다. 초는 어둠을 밝히는 등구이기도 하지만, 어리석음(無明)을 밝히는 진리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양초’의 ‘초’는 한자 ‘화촉(華燭)’에서 보듯이 ‘촉(燭)’자에서 나왔다. ‘촉’은 지금의 양초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등불’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초’는 불을 밝힐 수 있는 등화의 연료는 모두 ‘초’라고 할 수 있다.

양초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BC 2000년경, 투탄카멘 왕조 당시 양초는 갈대의 속이나 골풀에서 얻은 기름에 포화시켜 불을 켰다는 기록이 있고, 부처님 당시 ‘빈자일등(貧者一燈)’ 일화도 전해오고 있다. 그 일화에 따르면 주인공이 기름집에 가서 기름을 사왔다고 했으니, 액체로 된 식물성 기름으로 추측된다.

  그리스의 유적이나 중국의 분묘(墳墓) 등에서 발굴된 촛대 등으로 미루어 이미 BC 3세기에는 세상에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시대 때의 기록이 보인다. 연맥(燕麥 귀리)의 겨를 물에 이겨 삼대에 발라 건조시켜 불을 밝혔다고 한다. 초를 이용한 흔적인 촛대(등잔대) 등은 낙랑 이후의 유물이다. 이후, 등화문화가 발달하여 신라 진흥왕 때는 등물을 밝히고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燃燈會)를 시작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연등회를 전담하기 위한 연등도감(燃燈都監)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3세기 경 프랑스 파리의 상인 조합인 길드(Guild)에서 집단으로 양초공 등을 각 가정에 방문케하여 한해 동안 밝힐 초를 만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들어와서 밀랍이 일반화되었는데, 연기와 그을음이 많은 황색밀랍은 서민들이 썼고, 백납은 궁중에서 사용하였다. 사찰에서 밀랍을 쓰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무렵으로 보인다.

  또, 동물의 기름으로도 불을 밝혔다. 액체 형태의 수지(獸脂) 또는 우지(牛脂)로도 불을 밝혔다. 아메리카로 건너간 미국인들이 원주민 인디언들을 노예로 부려서 쇠고기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부를 축적했다. 18세기의 포경산업의 발달로 고래기름으로 만든 경랍(鯨蠟)이 등장했다. 우리가 양초를 한자로 ‘양촉(洋燭)’이라고 쓰는 것도 외국에서 경랍이 처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후, 19세기 중반경 석유 산업의 발달로 석유의 결정체인 파라핀 왁스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미국의 조셉 모르간(Joseph Morgan)이 실린더를 이용해 기름을 고체로 만들고, 심지를 박아 지금의 양초를 발명하였다.

  지금 사찰에서는 화재의 위험 때문에 액체화된 파라핀을 넣어 등장처럼 밝히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문경 봉암사 백련암 마당에 쓰는 액체 파라핀 등이다.